강토를 피에 잠근 천인공노할 만행

지난 세기 우리 나라를 비법적으로 강점하고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재난을 들씌운 일제의 죄악들가운데는 3.1인민봉기를 야수적으로 탄압한 천인공노할 죄악도 있다.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전대미문의 공포정치를 실시하면서 온 나라를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다.일제의 악랄한 폭압책동은 조선인민을 저들의 파쑈통치에 순종하는 식민지노예로 만들려는 가장 잔악무도한 범죄행위였다.
하지만 일제의 그 어떤 탄압과 위협도 외세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우리 인민의 드높은 반일기운을 억누를수 없었다.일제의 극악한 식민지통치하에서 상가집 개만도 못한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오던 인민들의 원한과 분노는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으로 폭발하였다.
이날 평양의 각계각층 군중은 낮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장대재에 있던 당시의 숭덕녀학교 운동장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독립 만세!》,《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리였다.시위대렬은 삽시에 10여만명으로 늘어났으며 분노한 항쟁군중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평양에서 타오른 반일투쟁의 불길은 삽시에 전국을 휩쓸었으며 해외에 있는 조선동포들에게까지 급속히 파급되였다.
봉기는 일어난 때로부터 석달동안 계속되였으며 항쟁에 참가한 각계각층 인민들의 수는 수백만명에 달하였다.
우리 인민의 거족적인 반일항쟁에 질겁한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비롯한 폭압무력을 총동원하여 수많은 애국자들과 시위군중을 닥치는대로 체포하고 야수적으로 학살하면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미쳐날뛰였다.
일제는 긴급내각회의를 열고 조선총독에게 봉기를 진압할데 대한 지시를 내리였으며 일본륙군성도 조선헌병대 사령관에게 《…일이 이미 이러한 상황에 이른 이상 단호한 조치로 나가지 않을수 없다.》는 폭압지령을 내렸다.
봉기가 시작된 첫날에 일제는 수많은 헌병,경찰무력을 긴급출동시켰으며 완전무장한 수비대병력까지 봉기진압에 내몰았다.조선주둔 일제침략군이 여기에 합세하였으며 본토에서도 무력이 증파되였다.일제는 지어 우리 나라에 있던 일본거류민들에게까지 살인흉기들을 쥐여주어 봉기를 탄압하게 하였다.
조선인살륙에 환장이 된 일제살인귀들은 가장 야수적인 방법으로 봉기를 진압해나섰다.일제군경들은 총과 칼,쇠몽둥이와 같은 흉기들을 가지고 닥치는대로 적수공권의 시위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륙을 감행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투옥하였다.이에 대해 일제의 어용학자 시노부까지도 《일본헌병은 차마 눈뜨고 볼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탄압에 광분하였다.… 일본헌병의 포악함은 형언할수 없는바 총검으로 찔러죽이고 목을 매달아 처형하였다.》라고 벌어진 사태에 경악을 표시하였다.
당시의 한 외국신문은 일제의 살인귀적만행에 대하여 《일본인이 감행한 란타와 악행은 너무나 흉악하고 참혹하여 사람의 귀로써는 그것을 들어서 믿지 못할 정도이며 사람의 사고로써는 그것을 리해할수 없는 행위로 되였다.》고 폭로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하여 3월 1일부터 10일사이에만도 체포된 사람들의 수는 남자 5만명이상,녀자 1 000명이상에 달하였으며 학살된 사람들의 수는 남자 1만명이상,녀자 300명이상이였고 부상자는 5만명에 달하였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에 대한 집단학살만행에 광분하였는데 대구참살사건,밀양학살사건,맹산학살사건,서울십자가참살사건 등 일제가 감행한 학살만행에 의해 삼천리강토는 우리 인민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3.1인민봉기가 일어난지 한세기이상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일제침략자들의 총칼아래 피를 흘리며 쓰러진 그날의 령혼들의 넋은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있다.그들이 품고 간 원한은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분노의 불길을 지펴올리고있다.
일본은 응당 지난 세기 저들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야수적만행과 략탈,우리 인민에게 들씌운 온갖 불행과 고통에 대하여 무릎꿇고 사죄해야 한다.
피에 절은 과거에 대한 사죄와 배상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일본은 명심하여야 한다.

본사기자  심 태 성